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단 편집) ===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관계 ===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6대조가 같은 인물이다.] 물론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본관만 같은 남남이나[* 단적으로, 같은 시대 인물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12촌간이었다. 조선은 친가와는 달리 외가와의 근친에는 다소 무심했다. 12촌이면 할아버지와 손자만큼 나이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23살 차이다. 그러나 가문 내 교류가 계속되었다면 꽤 가깝게 지내게 될 수도 있는 촌수다. ],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 엘리너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실상 엘리너를 키운 것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시어도어는 엘리너에게는 삼촌(큰아버지)이 된다.] 그러다보니 사적으론 둘이 교류가 제법 활발했다고 한다. 우선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어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도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윌슨을 지지했다. 물론 혁신주의라는 큰 틀에서는 공통점도 있었기에, 젊은 프랭클린은 테디가 본 책, 쓴 책은 모두 읽어봤다고 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도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둘은 후술되어있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한반도 문제 관련해서 상반된 행보로도 알려져있는데, 다만 이건 딱히 시어도어는 친일이고 프랭클린(더 나아가 후임 [[해리 트루먼]]까지)은 반일이라 그랬다는 식의 1차원적인 해석보단, 당시 미국과 일본의 목적이 어긋난 데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어도어 재임기 시절 서양 열강들은 중국에서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시베리아]]로 진출하길 바라고 있었다. 허나 일본은 자신의 목표를 시베리아가 아닌 중국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기에[*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 진출이 가지는 상징성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중화사상이 남아있던 시대였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서 대륙진출은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의도와 달리 중국 대신 러시아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 침략기의 미국인(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태프트]])의 일본관과 중국 침략기의 미국인(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의 일본관이 정반대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국간 관계가 훼손되자,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이란 무리수를 두게 되고 [[태평양 전쟁]]으로 패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